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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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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 인종은 1442년부터 1459년까지 섭정 통치와 친정을 거친 베트남 레 왕조의 황제이다. 레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세의 나이에 즉위하여 선자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섭정 기간 동안 과거 제도 개혁, 참파 침공 격퇴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공신을 죽여 대신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1453년 친정을 시작했으나, 1459년 형인 레응이전에 의해 살해당했다. 재위 기간 동안 다이호아와 지엔닌의 연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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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인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황제
왕조레 왕조
레 방 꺼 (Lê Bang Cơ/黎邦基)
시호흠문인효선명총예선황제 (Khâm Văn Nhân Hiếu Tuyên Minh Thông Duệ Tuyên Hoàng đế/欽文仁孝宣明聰睿宣皇帝)
묘호인종 (Nhân Tông/仁宗)
능묘목릉 (Mục Lăng/穆陵), 람낀, 탄호아
재위
즉위일1442년 9월 15일
퇴위일1459년 10월 28일
전임자레 태종
후임자레 응이전
생애
출생일1441년 5월 28일
출생지동킨, 대월
사망일1459년 10월 25일 (향년 18세)
사망지동킨, 대월
가족 관계
아버지레 태종
어머니선자황후
연호
연호1다이 호아 (Đại Hòa/大和): 1443–1453
연호2지엔 닌 (Diên Ninh/延寧): 1454–1459

2. 생애

레 인종은 레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초기에는 어머니 선자태후 응우옌(阮)씨가 섭정을 맡아 나라를 다스렸다. 이 시기 베트남은 참파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1446년에는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함락시키기도 했다.[1] 그러나 선자태후는 참언을 믿고 공신들을 숙청하여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1453년부터 레 인종은 친정을 시작하여 국사 편찬, 관리 봉록 및 왕족 봉지 관련 법 제정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1455년 판부선(潘孚先)에게 명하여 《대월사기속편(大越史記續編)》을 편찬하게 했고, 백관의 봉록과 왕후의 봉지에 관한 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459년 그의 형 레응이전의 쿠데타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보 3년 6월 6일(1442년 7월 1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3] 8월 4일(9월 7일)에 아버지가 급사하자 8월 12일(9월 15일)에 겨우 두 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이듬해 대화(태화라고도 함)로 연호를 개칭하였다. 어린 나이였기에 어머니 선자태후(응우옌 티 아인)가 섭정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참파의 침공을 격퇴하였고, 대화 4년(1446년)에는 정가와 정극복에게 반격을 명하여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참파 국왕 마하 비자야를 생포하여 승룡으로 압송하였다. 선자태후의 통치 아래 국내는 비교적 안정되었고, 대화 7년(1449년)에는 전산장십사조를 제정하였다.[3] 그러나 태후는 참소를 믿고 대화 9년(1451년)에 공신인 정가와 정극복 등을 죽여 신하들의 분노를 샀다.

대화 11년 11월 21일(1453년 12월 20일), 선자태후를 대신하여 13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하였다.[3]

2. 2. 섭정 정치와 참파와의 전쟁

레 인종은 즉위 후 다이호아(大和)로 개원하였고, 당시 나이가 2세였기 때문에 선자태후(宣慈太后) 응우옌(阮)씨가 섭정하였다. 선자태후는 섭정하면서 과거 제도를 개혁하였고, 개인의 사적인 전산(田産)에 관한 법률 14개조를 제정하였으며, 침공해온 참파 군대를 격파하고 그 왕 마하 비자야를 생포하였다.[1] 그러나 참언을 믿고 공신인 레카(黎可) 등을 죽여 대신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446년, 레 인종은 와 에게 반격을 명하여 참파의 수도 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참파 국왕 마하 비자야를 생포하여 승룡으로 압송하였다.[3]

2. 3. 친정과 업적

레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42년 6월 6일(양력 7월 1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3] 아버지 레 태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442년 8월 12일(양력 9월 15일)에 겨우 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듬해 연호를 다이호아(大和, 태화라고도 함)로 고쳤다.

어린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선자태후 응우옌씨(阮氏英)가 섭정을 하였다. 선자태후는 섭정 기간 동안 과거 제도를 개혁하고, 개인의 사유지(전산, 田産)에 관한 법률 14개조를 제정하였다.[3] 또한 참파의 침공을 두 차례 격퇴하였는데, 1446년에는 와 에게 반격을 명하여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함락시키고 국왕 마하 비자야를 생포하여 승룡으로 압송하였다.[1] 그러나 선자태후는 참언을 믿고 1451년에 공신인 정가와 정극복 등을 죽여 대신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453년 11월 21일(양력 12월 20일), 레 인종은 13세의 나이로 선자태후를 대신하여 친정을 시작했다.[3] 1455년에는 에게 국사 편찬을 명하여 《대월사기속편》(大越史記續編)을 완성하게 하였다. 또한 백관의 봉록과 왕후의 봉지에 관한 법을 개정하였다.

1459년, 레 인종은 형인 양산왕(諒山王) 레응이전(黎宜民)에 의해 선자태후와 함께 살해되었다.[3]

2. 4. 비극적 최후

1459년, 인종의 형인 양산왕(諒山王) 레응이전이 인종과 선자태후 응우옌(阮)씨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했다.[3]

레응이전은 100여 명의 무뢰배들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 왕을 살해했다. 그의 어머니인 황태후 투옌터는 다음 날 충성스러운 하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3. 연호

연호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서력1443년1444년1445년1446년1447년1448년1449년1450년1451년1452년
간지계해(癸亥)갑자(甲子)을축(乙丑)병인(丙寅)정묘(丁卯)무진(戊辰)기사(己巳)경오(庚午)신미(辛未)임신(壬申)
대화(大和)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연호11년12년13년14년15년16년17년
서력1453년1454년1455년1456년1457년1458년1459년
간지계유(癸酉)갑술(甲戌)을해(乙亥)병자(丙子)정축(丁丑)무인(戊寅)기묘(己卯)
연녕(延寧)11년원년2년3년4년5년6년


4. 평가

레 인종의 치세(1442년 ~ 1459년)는 초기에는 비교적 평화롭고 번영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 초기 (1442년 ~ 1451년): 레 태종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정 카를 비롯한 충신들의 보좌와 어머니 황태후 투옌 터의 섭정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유교 학자와 귀족 가문 사이에 일부 분쟁이 있었지만, 대체로 국가는 평화롭고 번영했다.[1]
  • 정카 숙청과 권력 장악 (1451년 ~ 1459년): 1451년, 레 인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랜 공신 정 카와 그의 장남을 처형했다. 2년 후 정 카는 사면되었지만, 이는 레 인종이 12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고대 베트남의 관습상 16세가 되어야 권력을 부여받을 수 있었기에, 이러한 조치는 구엔 티 안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엔 티 안은 1459년 쿠데타 이전까지 섭정을 지속하며 실권을 장악했다.[1]
  • 암살과 혼란 (1459년): 1459년, 레 인종은 형 레 응이 단과 여러 관리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구엔 티 안 황태후 역시 다음 날 살해되었다.[1]


이 시기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는 조정의 화합과 평화를 이룬 자애로운 통치였다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역사가는 조정이 혼란에 빠졌고 여성이 통치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정 카와 같은 유능한 조언자들이 물러나고 무능한 사람들이 등용되어 억압과 재앙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1]

5. 가족 관계

레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어린 아들 뱅 코(Bang Co, 레 인종)가 왕위를 이었다. 레 인종은 레 응이 단이라는 형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1]

레 인종의 어머니 황태후 투옌 터는 아들이 왕으로 책봉될 당시 21세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에서 더 큰 권력을 가졌다.

1459년, 레 인종의 형인 레 응이 단은 여러 관리들과 공모하여 왕을 살해했다. 음모자들은 궁궐에 들어가 왕을 살해했고, 다음 날 황태후 투옌 터는 충성스러운 하인에 의해 살해되었다.[1]

레 응이 단은 9개월 후 반란으로 제거되고 살해되었다. 베트남의 다음 왕은 레 태종의 막내아들인 레 성종이었다.

레 인종은 레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보 3년 6월 6일(1442년 7월 1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3] 레 태종이 급사하자 겨우 두 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이듬해 대화(태화라고도 함)로 연호를 개칭하였다. 어린 나이였기에 어머니 선자태후(응우옌 티 아인, 阮氏英)가 섭정하였다.[3]

6. 관련 작품


  • 검객 (2012년, 베트남)

참조

[1] 서적 The Champa Kingdom White Lotus Co., Ltd.
[2] 서적 明史
[3] 서적 大越史記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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